효종 가계도


제 17대 효종은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의 둘째 아들로 1659년에 


태어나서 1659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1649년 5월 부터


1659년 5월까지 재위하셨다고 하네요.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제18대 현종,숙신공주,숙안공주,숙명공주,숙미공주,숙정공주,숙경공주


등 1남6녀를 얻었고,안빈 이씨에게서 숙녕옹주를 낳았다고 합니다.


오늘은 효종 가계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효종의 업적


문화


문화면에서의 업적도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요 역법의 발전을 꾀하고자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한뒤 만든 시헌력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또한 '국조보감'을 재편찬하여 치도의 길을 바로 잡았으며,'농가집성'등의 농서를


마련하여 농업생산을 늘리려 하였습니다.흐트러져 있는 윤리를 바로잡고자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김정국이 집필한 '경민편'등을 간행하였습니다.





국방력 강화의지


효종은 평생동안 삼전도(병자호란 당시에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을 하여 청나라에 속국임을


알리는 비석.굴욕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비석입니다.)의 치욕을 되세기고 북벌에 집념을 하여


군비확충에 전력을 쏟고자 하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고 이를 뒷 받침해 줄 수있는


재정이 부족하게 되어 때로는 군사력을 증강하려는 의견과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의견이


대립하여 조신들과의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한채 1659년 5월 향년 41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다져놓은 군사력은 후에 조선 사회 안정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효종 가계도


인선왕후 장씨와 안빈 이씨 두명의 부인으로부터 1남 7녀를 두었으며 , 인선 왕후 장씨 소생인 현종을


비롯 여섯 공주 (숙신공주,숙안공주,숙명공주,숙미공주,숙정공주,숙경공주) 를 두었고 , 안빈 이씨 소생으로는


숙녕옹주 1명이 있었습니다.능호는 영릉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 서쪽에 위치하였다가 후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겨졌습니다.




인선왕후 장씨(1618-1674)는 우의정 장유의 딸이였으며 , 13세가 되던해 1630년 한 살 연하였던 봉림대군과


혼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하게 되자 소현세자를 따라서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끌려간채 8년여의 기간동안 


심양에서 생활하였다고 하며 1645년에 소현세자가 죽은뒤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이 되자 세자빈이 됩니다.





하지만 책봉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여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하였다고 전해지네요.후 세자빈에 책봉되고


1659년 효종이 서거한뒤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고 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제 17대 효종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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