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영실 업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삼둥이 아빠로 더욱 유명해진 송일국씨가


주연을 맡게될 드라마가 장영실을 주제로 제작이 된


다고 하여 그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데요 우리나


라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장영실 업적에 대해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장영실 


장영실은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입니다.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으며 ,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하기도 하였습니다.그 외에도 여러 과학적 도구를 제작 완성 하였습니다.





장영실의 생애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항주,소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에 귀화한뒤 아산군에 봉해졌던 장서의 9대손이며 집안이 고려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고 합니다.그의 부친은 고려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기녀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네요.





장영실 업적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의 관노였으며 그의 과학적 재능은 태종때 이미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하게 됩니다.


제련,축성,농기구,무기등의 수리에 매우 뛰어났으며 세종 3년때인 1421년 세종의 명을 받아 최천구,윤사웅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오게 됩니다.그 이후 1423년 세종 5년에 왕의 특명으로 면천되어


정5품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관노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그 이후 행사직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 제작을 감독합니다.





그 이후 계속 그 재능을 인정받아 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에 오르고 혼천의 제작에 착수 1년만에 완성하게 되며


이듬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감독하기도 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어냅니다.





1437년부터 6년에 걸쳐 천체관측용 대,소간의,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고정된 정남일구,앙부 일구,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포,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성하였으며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 구리,철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게 됩니다.





1441년 세계 최초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견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상호군에 특진됩니다.그러나 그 이듬해 세종이 신병을 치료하고자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길에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수레가 부서져 그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세종은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주


었다고 할 뿐 다른 처사는 없다고 기록되어있는데요 그 이후로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 어떻게 묘사가 될 지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장영실 대표 발명품 



해시계와 혼천의


해시계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텐데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림자에 따라 하루의 시각과 절기를 알 수 있도록


장영실이 발명한 것입니다.해시계를 통해 백성들이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12자로 시간이 표시 되었다고 하는데 세종대왕


님의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발명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혼천의는 하늘이 움직이는 모습을 한 눈에 관찰 할 수 있도록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어 별자리 움직임에 따라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그 당시에 이러한 발명품을 만들어낸 걸 보면 장영실 업적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격루,풍기대


자격루는 물의 증가량 혹은 감소량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입니다.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되었으며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게끔 한 물 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다고 전


해지며 중종 31년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습니다.





풍기대는 깃대 끝에 깃발을 매어 놓은뒤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바람에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도록 발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자이자 발명왕이기도 했던 장영실은 우리 실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발명하였으며 조선 전기 당대 최고


과학자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장영실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율곡이이 업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5,000원권 지폐를 통해서도 우리와 친숙한 역사인물인


율곡이이는 조선중기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와 함께 매우 유명한 역사적 인물중하나입니다.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치고 십만양병설등 개혁안을 주장한


율곡이이 업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율곡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입니다.흔히 율곡을 기호학파,퇴계를


영남학파의 대표로 여기어 경쟁관계로 오인하고 있으나 이는 퇴계의 영남학파가 동인 정파,율곡의


기호학파가 서인 정파로 전환되어 정쟁을 하게 된데서 생겨난 오해라고 합니다. 






이들은 35년의나이차가 있었으나 성리학에 대한 공감대와 열정으로 인해 만나는 순간부터 의기 상통하였으며 


학문적으로도 서로 보완해주는 사이였다고 합니다.퇴계 이황이 새로운 시대의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를 하였다면 , 율곡 이이는 이러한 퇴계의 학문적 토대 위에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하


하였다고 합니다.





율곡이이 업적


율곡 이이는 (만원 봉사)라는 정치 개혁 7조를 제시하였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10만 양병)을 주장하였습니다.


사창제및 대동법을 제의하여 사회정책에 이바지 하기도 하였습니다.도량이 넓은 성격이였으며 학문에서는


해석보다는 근본적 원리를 종합적으로 통찰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대해 (기발이승일도설)을 근본사상으로


하였습니다.퇴계와 함께 조선 유하계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이며 기호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동호문답),(율곡전서)등이 있습니다.


29세에 호조 좌랑에 처음 임명되어 예조 좌랑,부교리,춘추기 사관등을 지내면서 '명조 실록'편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또한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 향약''해주 향약'등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율곡이이의 사상


율곡은 철학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제,정치,사회 교육의 사상가였으며 경세가요 애국자였습니다.교육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교육가요 저술가로서 민본 덕치의 왕도정치 실현을 휘해 시의(時宜)에 맞는 개혁을 주창하기도 한 현인


이였습니다.이 뿐만 아니라 유비무환의 정신을 통해 국방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고 보국안민을 위하여 민족 주체의식


함양을 강조하기도 합니다.무실역행을 강조,실학사상의 정신적 바탕을 중심으로 인간성의 평등과 인격의 존엄성을


중시하기도 한 사상가로 유명합니다.





율곡이이 생애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게 됩니다.모두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9도 장원공'이라고 일컬어졌다고 합니다.1551년 16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한뒤 그 이듬해에 보응 스님으로부터 의암이라는 불명을 받고 산에서 하산하게됩니다.





23세에 퇴계 이황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의를 맺게 되며 별시에 응시 , 천도책이라는 글로 장원 급제합니다.이 때 천도책과


함께 그의 이름이 명나라까지 알려졌다고 하네요.26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29세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 다시 장원


급제하여 구도 장원공으로 불리게 되고 호조좌랑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그 이후 벼슬에 있다가 41세 벼슬에서 물러난뒤


해주의 석담으로 가 청계당을 짓고 100여명의 친천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일반 백성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격묭요결을


짓습니다.1581년 4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어 여진족을 물리칩니다.이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이후 3년뒤인 1584년에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동인의 반대로 인해 무산된 10만 양병설이 받아들여졌다면 임진왜란 초기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정도로 율곡이이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라고 볼 수있습니다.10만 대군이 양성되었다면 인명피해는 최소화하거나


효과적으로 막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네요





이상으로 오늘은 율곡이이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역사 인물중에 하나인 태종 이방원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영화 <관상>,드라마<육룡이 나르샤>등을


통해 재조명되기도 하는데요 고려의 변방 무장세력인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태종 이방원.이방원 가계도를 통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


겠습니다.







이방원


이방원은 이성계의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나 가문을 이어갈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습니다.핵심층의 자제가 아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오히려 자유롭고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어렸을적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고려말 우왕 9년 1383년에 17세 과거


문과에 급제를 한 수재라고 하네요.




그 이후 5년후 아버지인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로운 왕조건립에 지지부진한 면을


보이자 고려를 정리하고 새롭게 왕조를 세우자고 의견을 주장하게 되고 적대세력이 된 온건개혁파의


정몽주와 그 세력을 없애는데 앞장서게 됩니다.이러한 이방원의 노력으로 인해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게 되고


조선왕조가 세워지게 됩니다.물론 조선왕조 건립의 일등공신은 이방원이였습니다.





제 1 차 왕자의 난


방원(芳遠)의 난 혹은 정도전(鄭道傳)의 난으로 불리기도 하는 제 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에 공이 크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신임이 두터웠던 창업공신 정도전 일파와 그에 못지 않은 공을 세운


태조의 다섯번째 왕자 방원 일파 사이의 권력다툼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태조 즉위 후 세자 책봉 문제가생기자 태조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서 태조의 제 8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삼게되는데 


이는 왕권보다는 신권이 더 강해야 한다는 신권중심 왕조를 주장한 정도전과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힘을 합한걸로 


보여집니다.정도전은 왕권에 대한 야망을 보인 이방원보다 자신의 사상인 신권의 생각을 주입하기 


쉬운 방석을 왕으로 올리고 싶어했었기 때문입니다.



정도전


하지만 이러한 시도로 인해 이방원과 첫째 부인인 신의황후의 아들들을 분노하게 만들게 됩니다.조선 건국 초기에는 왕자들도 사병을 


거느릴 수 있었는데정도전이 방석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의 정치 개입과 사병을 거느릴수 없게 하자 이방원은 결국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로인하여 세자 방석을 폐출한뒤 귀양보내는 도중 형제인 방번까지 사살하고 정도전등을 불의에 습격하여 모두 죽이


고 남은 신효생등 조선왕조 건립을 도운 개국공신들까지 죽이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 가계도 



이방원 가계도


제 2 차 왕자의 난


정권을 잡게된 이방원은 자신이 아닌 둘째 형 이방과를 왕위에 앉히게 되는데 이는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자신의 형제와 개국공신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면 받게될 세상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지략이였습니다.자신이 세자로 추천한 이방과는 이미 왕위는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알고 이방원에게


모든것을 일임한뒤 유유자적한 삶을 살게됩니다.





이러한 변란으로 인해 두 아들과 사위,자신의 벗이자 신하였던 정도전등을 잃고 크게 상심한뒤 1398년


왕위를 세자인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게 됩니다.이러한 와중에 이방원의 윗형인


넷째 이방간이 왕위에 대한 야욕을 품고 제 1 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으나 그 공로를 인정


받지 못하고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여 결국 귀양까지 다녀와야 했던 박포와 결탁하여 이방원을 공격하게되나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방원이 쉽게 이방간의 공격을 막아내고 형 이방간을 귀양보내고 박포를 처형합니다.


그리고 이방원이 바로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정몽주


조선의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자신이 꿈꾸던 조선 왕조 건립에 사력을 다하기 시작하게 됩니다.왕권강화를 위해


일체의 사병을 두는걸 금지하고 중앙군에 흡수시키는 작업을 합니다.고려의 잔재 척결,서얼금고법,호패법 유교강화


및 불교억제에도 앞장서기 시작합니다.또한 자신의 아들 세종의 왕권강화를 위해 조선 건립에 혁혁한 공을세운


공신들을 척결하는데 힘을 썼으며 자신의 왕위 계승을 도운 장인,외척 세력도 가감없이 척결하게 됩니다.


또한 태종 이방원은 왕권강화 이후 벼슬 체계 정리 및 신문고를 세워 백성들의 민심을 항상 들으려 하였으며 


민생 안정에 몰두하여 조선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17년의 재위기간 동안 왕권강화 및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1418년 왕위를


물려주게됩니다.그 이후에도 왕권 강화를 위해 세종의 부인 소현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을 이유가 없이 숙청을


하는등 왕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여지를 없애려는 이방원의 권력 욕을 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 한성부지도


그 이후 태상왕에 있으며 세종의 왕권을 강화시켜 주려 했었던 이방원은 56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자신의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와 개국공신까지 살해하여 왕에 오르는


잔혹한 인물로 묘사될 수 있으나 다른 이면에는 조선 왕조의 왕권강화 및 유교 문화의 큰 기틀을 잡은 위대한


인물로도 역사는 기록되어있습니다.세종 대왕 역시도 태종이 다져놓은 기반으로 인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렇게해서 오늘은 이방원 가계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순신장군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우리나라 최고의 


장군을 뽑으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실 텐데요


뛰어난 업적과 위대한 장군이였기 때문일거라 생각됩니다.이렇게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이순신장군 업적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텐데요 역사를 좋아하는 저는


어떤 업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는지 한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신장군 업적


일본의 침략에 의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1592년)  , 이순신 장군은 최초의 해전이였던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도록 수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 명장입니다.




한때는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 세차례의 파직과 옥중생활을 겪었으며 백의종군이라는 시련도 겪게 됩니다.하지만 


정유년에 일본이 다시 침략하게 되자 복위하게 됩니다.이순신 장군은 전장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상대를 제압하게


됩니다.해전에서의 전략이 매우 뛰어나 학익진법을 비롯한 다양한 전투진법을 개발하였으며 , 이를 실전에 적용하


여 패전없이 승전만을 기록하는 위대한 명장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북선


어렸을적부터 이순신장군하면 떠올렸던 것이 '거북선'이였는데요 이순신 장군에 대해 논할때 거북선을 빼놓을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기존 전함 판옥선을 변형하여 거북선을 개발 실전에 투입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요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해전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술 , 화포와 거북선등의 무기를


적절하게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서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됩니다.




이순신장군 업적 정리



1차 출전에서 옥포와 함포,적진포등 3차례에 걸쳐서 일본함 42척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1592.5.7~8)


2차출전에서는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4차례에 걸쳐서 일본함 72척을 격파하게 되며 전라우수영 함대도


합류하게되어 판옥선 50여척과 보조선 100여척,병력 1만명 수준으로 전력이 증강되게 됩니다.(1592.5.29~6.7)





3차 출전에서 7월 5일 출전하여 8일에 한산도,9일에 안골포에서 연이러 승리를 거두게 되며 일본함 76척을 깨뜨리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이 해전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산도 대첩입니다.(1592.7.8~10)





4차 출전에는 부산포에 집결되있던 일본 함선 430여척을 공격하여 100여척 함선을 격침합니다.이로인해 일본군의


해상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일본 - 부산간 보금로 확보및 해안 기지 보호에 급급하게 하였으며 이후 오랜기간동안


남해에서 큰 해전이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1592.9.1)





5차 출전 (1593.2.1~3일,8일) : 옹포해전 왜 수군 외양 진출을 봉쇄합니다.


6차 출전 (1594.3.4) : 제 2차 당항포 해전 대선 12척 중선 14척 소선 4척을 격파합니다.





7차 출전(1594.9.29~10.4) : 제 1차 장문포 해전,영등포 해전,제 2차 장문포 해전 2척을 격파합니다.


8차 출전(1597.9.16) : 명량해전 30여척을 격파합니다.





9차 출전(1598.11.19) : 노량해전 200여척을 격파합니다.


노량해전중 왜구의 총탄에 의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겨 우리 군사는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높은 사기를 유지할 수 있어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순신장군 업적을 살펴보면서 항상 우리 가슴에 새겨놓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아직도 북한과 대립중인 휴전상태에서 한번쯤은 충무공 이순신장군


의 업적을 돌이켜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제 왕 계보 및 순서 


백제는 BC18년에서 660년까지 678년여간 존재하였던 나라로서


한반도 중부 및 남서부에 위치하며 고구려,신라와 함께


삼국을 이루었던 나라입니다.1대인 온조왕때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명하게되었는데요 백제 왕 계보 및 순서를


차례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 왕 계보 및 순서 그리고 업적


1대는 온조왕 입니다.(재위기간 BC18~AD28):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며 백제의 시조입니다.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로 명하게 되었으며 (BC18년) 말갈족의 침을을 물리치고


군사력을 바탕으로하여 그 이듬해에 동예와 동맹을 맺습니다.(BC16)





BC11년에는 말갈의 공격을 받게 되나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는 적 500명을 격퇴시킵니다.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우지만 동예가 말갈과 동맹하여 목책을 파괴하고 백제인 100여명을 사살하자


동맹관계를 끊고 다시 목책을 세운뒤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게 됩니다.BC5년.그 이후 동예가


위례성을 함락시키자 백제는 보복하기 위하여 동예를 공격하게 되나 폭설로 인하여 계획이 좌절되게 되고


맙니다.4년에는 석두와 고목에 성을 쌓고 6년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게 되나 마한의 압박으로 인해


철거합니다.





2대는 다루왕 입니다.(재위기간 28 ~77) : 다루는 지배자라는 뜻을 의미하고 몽골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늘


설이 있습니다.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위망이 있었다고 전해지네요.


28년 온조왕 서거이후 10년에 즉위하게 됩니다.흉년이 들자 백성의 곤란한 살림을 해결하고자 하는 정책으로


술의 양조를 금지하고 지방을 직접 순시하며 빈민 구호에 힘썼다고 전해지며 (38년),여러 차례 말갈족을


격퇴하였다고 전해 집니다.신라와의 영토전쟁을 진행하여 신라 와산성을 빼앗고 이후 다시 빼앗기게 됩니다.





3대는 기루왕입니다 (재위기간 77~128) : 다루왕의 장남이며 77년 다루왕 서거후 즉위합니다.


신라의 변방을 공격하였으며 이 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으며 그 이후로는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전해집니다.말갈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위해 원병을 보냈기도 하였다네요 (125년)





4대는 개루왕입니다 (128~166) : 기루왕의 아들이며 성역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길선이 망명하자 후하게 대접하고 신라에 돌려주지 않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신라 정부와 백제가 대립하는 세력이 놀게 되었다고 합니다.그 이후 신라군이 백제 국경을 침략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5대는 초고왕 입니다.(166~214) : 개루왕의 장남.소고왕 혹은 속고왕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길선 송환문제로 신라와의 계속 된 대립을 일으켰으며 신라,말갈과의 전쟁을 빈번하게 치루었습니다.


6대는 구수왕입니다(214~234) : 초고왕의 장남이며 귀수왕이라고도 명하였으며 7척의 키에 빼어난 풍채를


지녔으며 비범하였다고 전해집니다.말갈의 적현성 침범을 왕과 기병 8백명으로 격퇴하였다고 합니다.216년


신라의 우두진을 공격 5천명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며 수재와 한재를 대비 제방축소 및 농사를 권하게 하여


민생 안정을 꾀하기도 합니다.





7대는 사반왕입니다 (234) : 구수왕의 장남.사이왕 혹은 사비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나이가 어리고 무능하다고 하여 초고왕의 아우였던 고이왕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전해집니다.




8대는 고이왕입니다 (234~286) :고모왕 혹은 구이왕 이라고도 불려졌으며 초고왕의 아우였습니다.


재위기간중 신라와의 충돌이 잦았으며 고구려가 한나라,낙랑군과의 전쟁을 벌이는 사이 낙랑군 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246년 , 260년에는 유지되어오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을 두고 왕명 출납,


창고 관리,형벌 제도,의례 제정,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시켜 맡게 하였으며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 하고 


관직 위계에 맞춘 복장제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엄격한 법력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지배체제 정비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고이왕 서거후 백제 멸망시기까지 4백년 동안 백제 기본 제도로 유지


되었다고 하네요.





9대는 첵계왕입니다.(286~298)고이왕의 아들이며 책찬왕 혹은 청계왕으로 불리어졌으며 체격이 크고


기품과 의지가 걸출한 인물로 전해집니다.수도였던 위례성을 수리하였고 고구려 침공을 대비해 아차성및


사성을 수축하기도 하였습니다.


10대는 분서왕입니다.(298~304) : 첵계왕의 장남이며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여 보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304년에 낙랑군 서쪽 현을 공격하고 점령한뒤 그 해 낙랑군 태수가 보낸


자객으로부터 살해되게 됩니다.





11대는 비류왕입니다.(304~344) : 구수왕의 차남이며 사반왕의 동생이였습니다.


힘이 세고 활을 잘 다루었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12대는 계왕입니다.(344~346) : 분서왕의 장남이며 나이가 어려 사바왕의 동생인 비류왕이 왕위에 오른뒤


그가 죽자 즉위하였습니다.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비류왕의 41년간의 재위기간으로 인하여 늦게 재위한 까닭에 그는 즉위 3년뒤 사망하게 됩니다.


13대는 근초고왕입니다 (346~375) : 비류왕의 차남.초고왕 혹은 조고왕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4세기 중반


백제를 부흥시킨 왕으로 유명합니다.총명하고 체격이 크고 우람하였으며 둘째왕임에도 차기 왕으로 지복


받게 됩니다.





14.근구수왕(375~384) : 근초고왕의 아들.태자 시절부터 왕을 도와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는등의 국력 신장에 힘썼으며 중국 일본과 국교를 맺고 중국의 제반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15.침류왕 (384~385) : 근구수왕의 맏아들.불교 공인 및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6.진사왕 (385~392) 근구수왕 차남 .성품이 강인하고 총명하였으며 지략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17.아신왕(392~405) : 침류왕 맏아들 아화왕 혹은 아방왕으로 불리었으며 부왕 서거후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한뒤 진사왕이 8년후 서거하자 그 뒤로 왕이를 이었습니다.





18.전지왕 (405~420) : 아신왕 아들이며 진지왕 으로도 불리었습니다.


19.구이신왕(420~427) :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긴밀한 관계 유지에 힘썼으며 이는 고구려와 북조의 동맹관계를


대비한걸로 파악됩니다.


20.비유왕 (427~454) :구이신왕 장남이며 외모가 수려하고 언변이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4부 순시 및 가난한 백성


구제에 힘썼으며 428년 ,신라와 나제동맹 체결을 맺고 왜와의 관계도 잘 정립하여 백제위기극복에 힘썼다고 합니다.


21대는 개로왕 입니다.(455~475) : 이름은 경사 , 여경으로 불리었으며 근개루왕이라고도 하였습니다.바둑을 매우


잘 두었다고 하네요.





22대는 문주왕 (475~477)입니다 : 개로왕의 아들로서 즉위 전 부왕을 도와 상좌평으로 국정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성품이 유하여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또한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3대는 삼근왕 (477~479) 입니다. : 문주왕의 맏아들로서 임걸 혹은 삼걸왕으로도 불리었습니다.


13세에 즉위하여 부왕을 죽인자인 해구에게 정사 일체를 일임합니다.478년 해구의 반란을 격살하게 됩니다.


24대는 동성왕 (479~501)입니다 : 문주왕의 아우였던 좌평 곤지의 아들이며 모대,마제,마모,여대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즉위기간에 백제 사회가 안정되어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백제 혼란 수습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말기에 이르러 향락에 빠져 살고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501년 사냥중 폭설을 만나 근처에 머무르던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하던 위사좌평 백가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25대는 무령왕(501~523)입니다 : 동성왕의 차남이며 융,사마라는 이름과 무령이라는 시호를 가졌습니다.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하였으며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을 지녔다고 합니다.


금강유역 ,호남평야 개발을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였으며 귀농정책을 실시하여 유민을 정착시킴으로서 농업 노동력을


확보 조세 기반 마련을 하게 됩니다.무령왕릉으로부터 수많은 부장품이 발굴되어 백제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26대는 성왕(523~554)입니다 : 이름은 명농이며 무령왕과 더불어 백제의 영주라고 불리는 왕입니다.


27대는 위덕왕(554~598)입니다 : 성왕의 장남이며 태자시절부터 성왕을 보필하여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신라가 동맹을 어기자신라 정벌론을 펼쳤다고 합니다.



28대는 혜왕(598~599)입니다 : 위덕왕의 동생이자 성왕의 차남이였으며 헌왕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즉위기간중 이미 나라의 힘이 약화되었 사회 내부 문제가 곪고 있었다고 합니다.황해 무역기지를 신라와 고구려에 빼앗기고


일본과 중국등의 경제 활동무대를 잃게 되면서 귀족들또한 백제 내부로 한정되어 있는 땅과 권력에 욕심을 내게 되는 현상이


생기게 되고 이로인해 내분도 심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29대는 법왕(599~600)입니다 : 혜공왕의 맏아들이였습니다.특별한 업적은 없으며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살생을 금기하고


사냥도구를 수거하고 민가가 기르는 매를 방생하게 하였다고 하네요.재위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하네요.





30대는 무왕 (600~641) 입니다. : 법왕의 아들이였으며 삼국유사 무왕열전을 보게 되면 강가에 살던 과부인


 무왕의 어머니가 검은용과 통정하여 낳은 아들이  재주가 매우 뛰어나고 용기가 있어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무왕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31대는 의자왕 (641~660) 입니다 : 무왕의 맏아들이였으며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서 해동증자로도 불리였다고 합니다.


신라를 공격하여 40여개의 성을 빼아앗으며 대야성을 함락시키는등 신라에 많은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642년


고구려와 화친한뒤 당항성을 빼앗고 신라의 당나라 방문로를 막는 등 신라 견제를 하였습니다.643년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을 위해 원군을 신라에 요청하자 의자왕이 그 때를 노려 649년 신라의 7성을 공략하였으나 


오히려 김유신으로부터 역습을 당하게 됩니다.그 이후 백제가 이를 다시 빼앗았으며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성 30여개를


빼앗습니다.655년  신라가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 660년 하자 의자왕은 기벌포에 기병 2만을 보내었으나 전멸하게


 되고 탄현에 계백장군을 5천명의 군사와 함께 보내 네 번을 승리하지만 결국 전멸하여 백제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게 됩니다.


수도였던 사비성이 포위되자 웅진성으로 태좌와 함께 피난하였으나 웅진성 방령 예식의 쿠데타로 인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그 후 왕자들과 대신을 포함하여 백성 만 이천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된뒤 그해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하네요.





스스로 백제 역사에 관심이 많아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니 부족한 점이 많을것 같네요.


혹시라도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수정 부탁드립니다.~


이상으로 백제 왕 계보 및 순서 , 업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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